이번엔 비도 오지 않았다. 깜깜한 밤에 누워서 편하게 본 코미디였다. 그런데 전봇대가 나오는 순간, 나는 영화가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을 보고 있었다.
리틀 포레스트처럼 확 와닿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 보고 나서 더 오래 남았다.
영화 정보
- 감독: 장철수 / 주연: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 손현주
- 2013년 개봉, 123분
북한 최정예 공작원이 달동네 바보 동구로 위장해 살아가는 이야기다. 전반은 코미디, 후반은 다른 영화가 된다.

전봇대와 찜통
전봇대와 골목길이 나오는 장면에서 어릴 때 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전봇대를 본진 삼아 편을 가르고, 가위바위보로 점수를 따고, 전봇대에 몸을 대면 잡히지 않는 놀이. 한번 시작하면 두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놀았다.
우리 동네에선 찜통이라고 불렀다. 당신 동네에선 뭐라고 불렀는지 궁금하다.
뺑뺑이와 란
옛날 놀이터에는 시소, 그네, 철봉, 정글짐, 그리고 동구가 열심히 돌리던 뺑뺑이가 있었다. 우리 동네 것은 동그란 원형이라 안에 타거나 밖에 매달려서 탔다. 동구가 란(이채영)과 놀이터에 있는 장면 — 란이 아이가 있다고 밝히는 슬픈 장면인데, 나는 그 뺑뺑이 때문에 옛 추억이 더 떠올랐다.

촬영지였던 곳 — 이제는 없는 달동네
촬영지를 찾아봤는데, 현재는 재개발이 끝나서 가도 볼 수가 없다. 동구가 뛰어다니던 달동네는 인천 십정동의 열우물마을이었다. 영화가 개봉하고 3년 뒤인 2016년, 마을 주민들은 이별잔치를 열고 동네를 떠났다. 지금 그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서 있다. 어쩌면 이 영화가 그 동네의 마지막 기록인 셈이다.
나도 고향에 가서 어릴 때 살던 지역을 지나가 본 적이 있다. 이제는 개발이 되어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더라. 영화 속 동네도, 내가 찜통을 하던 골목도 그렇게 사라졌다.

그 골목이 그립다면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대신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같은 인천 제물포구(예전의 동구)에 있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1960~70년대 달동네를 통째로 재현해놓은 체험형 박물관이라, 동구의 골목 같은 풍경을 직접 걸어볼 수 있다. 만지고 체험하는 전시가 많고 유모차로 다니기 편해서 아이와 가기에도 좋다.
- 주소: 인천 제물포구 솔빛로 51
- 관람시간: 09:00~18:00 / 휴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 입장료: 어른 1,000원, 어린이 무료 / 주차 가능
근처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영화 ‘극한직업’의 치킨집이 있던 골목이다. 묶어서 반나절 코스로 돌기 좋다.
방문 정보는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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