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쿠키영상 내용이 나옵니다. 결말은 다루지 않습니다.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인데, 영화에 나오는 건 물과 얼음이다.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조선판 어벤저스 이야기인데 그들이 훔치는 게 하필 얼음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털려고 하는 얼음창고 — 서빙고는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표석 하나만 남았다.
이 글에서 볼 것
- 영화 이야기 — 얼음창고를 통째로 훔친다는 설정에서 멈칫한 이유
- 사라진 서빙고 — 13만 정의 얼음을 쌓아둔 창고는 어디에 있었나
- 방문 정보 — 서빙고역 1번 출구의 표석, 그리고 서빙고로 137

영화 정보
- 감독 — 김주호
- 주연 — 차태현, 오지호, 민효린, 성동일
- 개봉 — 2012년 8월 8일
- 상영시간 — 121분
- 관객수 — 약 490만 명
- 영문 제목 — The Grand Heist
서자로 태어나 출셋길이 막힌 이덕무가, 얼음 이권을 쥐고 백성을 쥐어짜는 좌의정 조명수를 노린다. 도굴꾼·폭약 전문가·객주처럼 기술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빙고의 얼음을 통째로 훔칠 계획을 세운다.
기대 없이 봤는데 재미지게 봤다 — 조선판 어벤저스
각종 영화에서 조연이나 감초 역할을 한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보는 내내 그냥 기대 없이 재미지게 봤다. 고창석, 성동일, 신정근 이 세 명이 주로 웃기는데 초반에 죽는 책방 주인 그리고 차태현까지,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들이 모여 있었다.
제일 크게 웃은 건 마지막쯤이었다. 다 같이 싸우는 장면에서 묶여 있는 성동일이 절규하는데, 그게 난 제일 웃겼다.
차태현은 얼굴이 호감상인데 뭔가 보면 편해진다고 해야 하나. 편안한 코미디라서, 이렇게 튀는 조연들 사이에서 밸런스를 잡는 배우 같은 느낌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차태현이 나오면 쉬어가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차태현은 웃기는 쪽이 아니라 받아주는 쪽이다. 고창석과 신정근이 치면 차태현이 받는다. 그래서 코미디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피곤하지 않다.

쿠키영상 이야기도 하나 하고 싶다. 극중에 눈썹이 탄 아이가 나오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누가 되는지가 복선으로 깔려 있다. 눈썹으로도 알긴 알았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쿠키영상에서 잠깐 나온 송중기의 연기에 놀랐다. 아역배우 특유의 표정을 그대로 잘 표현해서, 오히려 그게 눈썹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근데 왜 하필 얼음이었나 — 주인 이름 한 번에 줄이 무너진다
하인들이 얼음을 받으려고 줄을 쭉 서 있다. 그런데 어떤 하인이 갑자기 제일 앞으로 딱 와서 선다. 뒤에 있던 하인들이 웅성웅성거린다. 그러니까 새치기한 하인이 뒤돌아서서 딱 말한다. 어느 집 하인 누구라고. 그 말에 뒤에 있던 하인들이 입을 다문다.
노비도 대감집에서 해야 한다는 말이 딱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건 줄 자체는 공평했다는 점이다. 신분대로 선 게 아니라 먼저 온 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주인 집 이름 한 번에 그 순서가 없어진다. 규칙이 없어서 밀리는 게 아니라, 규칙이 있는데도 밀린다.
그리고 이게 웃기려고 만든 설정도 아니다. 조선의 얼음은 아무나 사는 물건이 아니라 나라가 순서를 정해 내려주는 물건이었다.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정2품 이상의 문무 관리에게 나눠주는 몫이었고, 한여름에 얼음을 받는 것 자체가 신하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얼마나 엄격했는지는 단종 2년(1454년) 사헌부 상소에 남아 있다. 나라 빙고의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니, 정1품에서 종4품 이상과 각 관청이 따로 얼음을 보관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얼음을 소홀히 관리해 녹여 없애면 파면까지 시켰다.
줄 밖에서는 이미 신분 순서였던 셈이다. 얼음을 받을 자격 자체가 관품으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니 줄 안에서만 잠깐 선착순이었던 것이고, 그 선착순은 주인 이름 앞에서 버티지 못한다. 웃기게 지나가는 30초에 이 영화가 왜 얼음을 훔치는 이야기인지가 다 들어 있다.
반대로 뜻밖의 대상도 있었다. 얼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거기에 고위 관직자와 함께 병자와 죄수가 들어 있었다. 옥에 갇힌 사람에게 여름 얼음을 나눠주는 제도가 있었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이 조사에서 제일 의외였다.
서빙고는 정말 있었다 — 금보다 귀했던 얼음
먼저 규모부터. 얼음 한 덩어리를 1정(丁)이라고 했는데, 무게가 5관이었다. 『만기요람』에 남은 저장량이 서빙고 134,974정, 동빙고 10,244정, 내빙고 40,000정이다. 조선 후기 네 곳을 합치면 대략 20만 정, 무게로 3,750톤쯤 된다.
용도도 창고마다 갈려 있었다. 국가 제사에 쓰는 얼음은 동빙고, 왕실과 정2품 이상 관리에게 나눠줄 얼음은 서빙고, 궁궐 안 수요는 창덕궁의 내빙고 두 곳이 맡았다. 창고 수도 동빙고가 1동인데 서빙고는 8동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서빙고 하나만 이야기하는 건 크게 틀린 게 아니다. 숙종 6년(1680년) 기록을 보면 서빙고의 얼음이 전체의 70%였다. 조선의 얼음창고를 하나만 꼽으라면 서빙고다.
영화에서 이덕무 일당이 노리는 양은 3만 정이다. 1만 정은 빼돌리고 2만 정은 물길로 강으로 흘려보낸다고 말한다. 실제 저장량과 맞춰보면 서빙고 전체의 5분의 1 조금 넘는 양이고, 무게로는 약 560톤이다.
찾아보고 나서 오히려 놀란 건 이쪽이었다. 창고를 통째로 비우는 설정이 아니다. 여덟 채 중 한두 채 분량을 가져가는 계획이다. 어벤저스 영화치고 숫자가 얌전한 편이다.
이 얼음은 한강에서 캤다. 그것도 아무 때나가 아니라 강물이 네 치(약 12cm) 두께로 언 뒤부터, 음력 12월에서 1월 사이에 캤다. 작업은 새벽 2시쯤 시작해 해가 뜨기 전에 끝냈다. 낮에 캐면 녹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한양 백성에게 지워진 국역이었고, 장빙역(藏氷役)이라고 불렸다. 한성부의 중부·동부·서부·북부 주민이 동원됐다. 겨울 새벽에 언 강 위에서 얼음을 떠서 창고까지 옮기는 일이라 사고가 잦았다. 그래서 얼음 위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칡으로 꼰 새끼줄을 깔았고, 강변에는 불을 피워 몸을 녹이게 했고, 의원과 약을 따로 비치했다.

얼음이 큰 이권이었다는 영화의 설정도 근거가 있다. 영조·정조 시대 이후에는 한강변을 비롯해 전국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대는 사빙고(私氷庫)가 생겼고, 한강 근처만 해도 30여 곳에 이르렀다. 양반층까지 얼음 사업에 뛰어들었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에 얼음은 실제로 돈이었다.
그럼 그 서빙고는 어디에 있었나. 1396년(태조 5년) 예조 소속으로 세워졌고, 위치는 둔지산 기슭이었다. 지금 주소로는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이다. 광무 2년(1898년) 두 빙고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가까이 운영됐다.
동빙고는 원래 지금 동빙고동이 아니라 두모포, 즉 성동구 옥수동 근처에 있었다. 연산군 때 서빙고 왼쪽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 지금의 용산구 동빙고동 자리로 왔다. 동네 이름만 남고 창고는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건 창고만이 아니다. 얼음을 캐던 자리도 없어졌다. 조선의 채빙 장소는 저자도(楮子島) 근처 한강이었는데, 저자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자리에 있던 삼각주 섬이다.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 불렸고, 동서 2,000m에 남북 885m, 면적 118만㎡ 규모였다.
이 섬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압구정동을 개발하면서 흙과 모래를 퍼내 매립용으로 쓰는 과정에서 통째로 없어졌다. 섬 하나를 퍼다가 강 건너 땅을 메운 셈이다. 지금 옥수역 아래 한강변에 성동구가 세운 안내 표지판이 있고, 2023년에는 퇴적으로 일부가 다시 드러나기도 했다.
영화 속 사람들이 파고들던 창고, 그 얼음을 캐던 강 위의 섬. 둘 다 이제 없다.
그 자리에 지금 남은 것 — 표석 하나, 그리고 서빙고로 137

극중 배경 — 한양 서빙고 (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일대)
실제 촬영지 — 충북 제천 무암사·무암저수지 일대, 경기 포천(토굴 수중 촬영)
조선의 얼음창고가 있던 자리에 지금 남은 것은 표석 하나다.
경의중앙선 서빙고역 1번 출구로 나와 서빙고파출소 왼쪽을 보면 ‘서빙고터’라고 새긴 표석이 서 있다. 1990년에 세운 것이고, 주소는 용산구 서빙고동 199-4다. 500년 동안 13만 정의 얼음을 쌓아둔 창고가 있던 자리를 알려주는 것이 이 돌 하나다.

솔직하게 말하면 표석 말고는 볼 게 없다. 창고 건물도, 복원물도, 전시관도 없다. 역에서 나오면 학교와 파출소와 주택가가 있고, 그 너머는 오랫동안 미군부대였던 땅이다. 그러니 이 표석 하나를 보러 서빙고역에 내리는 건 권하지 않는다.
대신 이 동네에는 얼음창고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박물관이 하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주소가 서빙고로 137이다. 박물관 뒤편이 바로 그 옛 미군기지, 지금의 용산공원 예정지다. 표석과 박물관은 걸어서 닿는 거리다.
다만 여기서도 과장하지 않겠다. 이 박물관에 서빙고나 얼음을 다루는 전시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서빙고 유물을 보러 가세요”라고 쓸 수는 없다. 확실한 건 상설전시가 무료라는 것, 그리고 조선시대 전시실을 보고 나와서 서빙고로라는 길 이름을 다시 읽으면 기분이 조금 다르다는 것 정도다.
국립중앙박물관 방문 정보
- 주소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 관람시간 — 월·화·목·금·일 10:00~18:00 / 수·토 10:00~21:00
- 휴관일 —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 관람료 — 상설전시 무료
- 가는 법 —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박물관 서문 방향 도보 약 10분 /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에서도 도보 가능
- 문의 — 02-2077-9000
방문 정보는 바뀔 수 있으니 가기 전에 한 번 확인하는 걸 권합니다.
실제 촬영은 서울이 아니라 충북 제천에서 많이 이뤄졌다. 제천 무암사와 무암저수지 일대가 확인된 촬영지이고, 제천영상미디어센터에는 이 영화 포스터가 전시돼 있다. 물에 잠긴 토굴 장면은 경기 포천에서 찍었고, 2012년 2월 29일에 촬영을 마쳤다. 서빙고 내부는 세트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도로명주소가 전면 시행된 게 2014년이다. 이제 주소가 무슨 동 무슨 동이 아니라 강남대로, 무슨로 이렇게 바뀌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역사가 남아 있는 서빙고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니, 얼음창고가 아직 일하고 있는 셈이다. 500년 전 창고 이름이 지금 택배 송장에 찍힌다.
여러분 동네에도 이런 이름이 있나요. 창고도 다리도 없어졌는데 이름만 남아서, 매일 지나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정류장이나 길 이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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